집을 나섰다.
우산을 들고. 하늘이 비를 쏟아 낼 것 같아서다.
건물을 벗어나 3미터쯤 갔을 까?
후두둑 거리더니 빗줄기가 스파게티만하다.
순식간에 바지가 다 젖었다.
사무실에 급히 들어와 정리를 하고 잠시 숨을 돌리니 어라! 비가 그쳤다.
그런 때가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때
보충수업을 하고 운동장을 향해 발걸음을 떼고 진입로에 드러가면 소나기가 무진장 내렸더랬다.
인순이 언니 집에 가서 속옷까지 젖은 옷을 모두 벗고 언니의 옷을 빌려 입었더랬다.
그때면 언니는 파전을 해주었었다.
정말 파가 많이 들어가서 파 향이 향긋한..
매일 내가 어쩌지 못하는 즈음의 거리를 걸으면 소나기가 내렸고 그때면 재밌다고 소리치며 언니랑 흠뻑 젖었다. 노래도 불렀던거 같다. 컨츄리 로드 컨츄리 홈 언니가 잘 부르던 팝송이다.
기다리면 비가 안오고 진입로에 들어서면 비가 홈빡 오고..
그 여름날이 특별하게 오래도록 기억나는건
그 소나기가 언니와 나를 위해 내렸을거란 이유에서다.
참 재밌고 행복했던 소나기에 흠뻑 젖기였다.
오늘 문득 그날이 떠오르면서 추억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며
좋은 추억을 만다는 것 역시 얼마나 아름답고 중요한 일인가
그리고 그것은 온전히 나의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감사한 일을 찾으려고 하면 어쩌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에 감사함을 부여하려면 온갖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감사함은 어쩌면 찾는 것이 아니고
내가 오늘 경건하게 이름을 짓듯 모든 것에 이야기를 지어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목욕탕에 갔다.
낯익은 얼굴들.
그러나 인사를 나눈 적이 없는
쳐다보기도 민망하기도 하고 모른척 하기도 애매한 자주 보는 얼굴들이 가득했다.
매일 저 사람들은 열심히 모여서 사우나를 하고 찬물에서 놀고 수다를 떨며 여름을 지내고 있었나보다.
사우나 실에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목욕탕 전체에 울려퍼진다.
아줌마들의 웃음소리는 매미소리 같다.
왕창 웃어재끼는 잦아드는가 싶으면 다시 와아하고 커지는.
볼륨 최상의 스피커다.
그런데 그들의 웃음 소리를 들으면 나도 푹 웃음이 난다.
무슨 이야기로 누가 웃겼을까 하는 호기심도 생기면서
아줌마들의 순발력과 유연함, 참여적 동지의식들이 느껴져서 부럽기까지 하다.
나는 늘
매일 보면서도 인사도 못트는 소극적인 사람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웃이 그냥 이웃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웃을 일이 있어 좋다.
신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책들을 뒤적여 읽어보다 쉘 실버스타인 책을 발견했다.
어릴 적 내가 가장 아끼던 책 중의 하나가 쉘실버스타인의 책들이었다.
무진장 재밌고 그림도 재밌고 웃기고 신기하고 놀랍고 ..
어제 아이들 독서책 궁리하다 내가 중학교 다닐 적에 읽었던 책들을 떠올려 보았다.
문득 한 아이가 누나를 마구 욕하는 책이 생각났다.
그거 읽을 즈음에 신부님 우리 신부님도 같이 읽었더랬는데 제목이 생각 나지 않았다.
동생들한테도 이야기 해보니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그러다 화장실에 앉아있는데 퍼뜩 떠오른 책제목.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기억도 가물한데 제목만으로도 웃음이 가득 피었다.
내가 생각해내지 못하는 것들에 비해
나의 마음은 그것을 고스란히 기억해내는가보다.
머리와 마음이 따로 논다는 것이 확 느껴진다.
인터넷으로 내용을 다시 훑어보니 생각이 마구 난다.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
신부님 우리 신부님도 정말 행복한 책이었는데.
웃음이 나는 걸 보니 엄청 웃으며 읽었나보다.
이렇게 후다닥 찾아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어서 감사하다.
그 수만은 역사의 순간 중에 이 시기에 내가 살 수 있느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전생과 후생 그 어느 시기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어쩌면 어디선가 또다른 내가 살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인식하고 느끼는 이 꿈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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