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저 평범한, 정말 아무 눈에도 이렇다하게 뜨일 일이 없는 평범한 여자다.
적당하게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기도 하고 가끔은 적당하게 남을 무시하면서 그저 하루 별탈없이 지나가기를 바라는 여자다. 소원이라기엔 너무 소소한, 그저 오늘 하루 상사에게 혼나지 않고, 지나는 차에 치이지 않으며 점심 먹으러 들어간 식당의 음식이 밥값에 비해 억울하지 않기만을 바라며 살다가 혼자 방에 눕는 그런 여자다.
그런 내게 어느날 그 남자가 왔다. 그도 오늘 하루 그저 무탈하게 지나기를 바라는 소박한 남자였다. 나와 다른 것이 있다면 그는 나보다 큰 집이 있었고 집에 돌아가면 반겨줄 아내와 두 아이와 강아지 한 마리가 있었다. 그러하다고 그가 말했다. 그런데 그는 그러한 사람들이 가득차 있는 곳을 두고 내게로 왔다.
나의 작은 공간, 누군가를 받아주고 함께 하기에는 너무도 협소한 공간 속에 그를 받아 들일 수가 없었다. 나는 독신주의자도 아니고 동성애자도 아니고 결혼반대자도 아니지만 그저 나 하나 건사하기에도 벅차서 조용하게 나 혼자 눈에 띄지않게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 공간 속에 그가 왔다.
비가 몹시 오는 날이면 그는 내 공간을 찾았다. 때로는 술에 소낙비마냥 젖었을 때도 내 공간을 찾았다. 어쩌다 우연인 듯 들렀다. 반기지도 내치지도 못하는 어정쩡함 속에 그는 공간의 한 모퉁이에 앉았다 갔고 항상 어정쩡하게 마시다 남은 커피 두 잔이 남아 있었다.
어느날,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방에는 훈기가 약간 도는 그런 날, 그는 나를 찾아와 내 손을 잡고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빼기도, 밀쳐내기도, 가만 있기도 애매한 아니 당황함 속에서 나는 알아버렸다. 이건 가벼운 어떤 것과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그는 나의 공간에 들렀다. 가끔은 비가 왔고 가끔은 술 냄새가 났으며 그리고 가끔은 햇살이 소란하게 부서지는 그런 날이었다. 그는 나의 비좁은 공간에서 맘껏 놀았으며 푹 쉬었으며 웃었다. 그것이 가볍고 무의미하고 감각적이라면 시간 속에서 지쳐갔을 것인데 처음 손등의 입맞춤처럼 가볍과 무의미하고 하찮은 것이아니었다.
나란히 벽에 기대어 앉아서 발끝에 달린 햇살을 보고 있을 때 그가 나를 불렀다. 나의 나직한 대답 끝에 그는 열매처럼 말을 달아 놓았다. 사랑해.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더 자주 열매를 맺듯 속삭였다. 사랑해. 그 말에 무게를 두지 않으려고 그 말이 열매마냥 마음 끝에 달리면 나는 당신이 사랑을 알어?라는 질문으로 사랑해라는 말을 떼어내고 꼭지만 남겨두었다.
그는 눈빛과 음성과 단어와 손길에 점점 감정의 무게를 더해갔고 그럴수록 나는 부지런히 추수하는 여인마냥 꼭지만 남기려고 언어를 감정과 함께 떼어냈다. 그러다 가끔은 나도 실수인지 체념인지 포기인지 모르게 나도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해버렸다. 순식간에 그 말은 그의 마음에 새싹이 되고 나무가 되어 그의 안식처가 되어 주워담기에는 늦어버렸다.
그에게 조심스러웠던 나의 공간은 양해와 허락이 없어도 되는 자유로운 그의 공간이 되어갔다. 가끔은 나의 공간이라고, 나의 것이었다고 상기 시키고 나의 권리를 행사하려고도 했지만 그는 알았다. 이미 우리의 것이라는 것을. 그는 여전히 그리고 더 자주 사랑해라는 말을 소리로 내었으며 사랑스러운 이라거나 사랑하는 이라거나 하는 응용의 말로 다른 것을 표현하기도 했다.
사랑이 느껴지지도 않고 다른 방에서 잠을 자지만, 항상 돌아가면 밥을 차려주고 당신의 아이를 키우며 당신의 속옷과 셔츠를 빨아주는 그 여자에게 당신이 지닌 그 마음이 사랑이라고 나는 가끔 가슴 시리게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저 인생의 작은 이벤트같은 것이며 나는 그저 지나면 추억꺼리밖에 되지않는 것이라고. 의미도 두지 말고 마음도 두지말고 그리고 어느 날 문득 당신의 발길이 멈추면 그것이 우리의 연이 다한 것이라고 그렇게 알고 있을 테니 당신도 당신의 사랑이 어디있는지 빨리 알아채라고..
그렇게 사랑을 하다가 사랑을 일깨우다가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다시 겨울이 오고 다시 봄, 봄, 봄, 봄 그리고 다시 봄이 왔다. 그는 여전히 작은 나의 공간에 들어와 나를 안고 내 가슴을 물고 잠을 잔다. 그는 여전히 내게 사랑한다고 말을 하고 나는 당신이 사랑을 아느냐고, 당신이 사랑하는 것은 당신의 아이와 씨름을 하며 당신에게 투덜거림을 멈추지않는 그여인인데 아직도 모르냐고 말을 한다.
그는 여전히 나의 공간에 들어와 나를 온통 차지하며 사랑해를 시처럼, 한숨처럼, 선언처럼 말을 한다. 나는 여전히 그에게 있어 나란 여자는 그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는 추억같은 여자라고 스스로 규정지으며 매 순간 이별을 한다. 그가 내 이름을 부르고 쉼표 하나를 찍고 나서 사랑해라고 말을 할 때 나는 그의 작은 우주를 본다. 그리고 안다. 그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정말 하고 싶어하는구나. 그래서 나도 그를 사랑한다. 어쩌면 그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는 더 그를 사랑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사랑을 하고 싶어 나를 사랑하지만 나는 그를 사랑하기에 사랑을 한다.
그는 오늘도 나의 가슴을 물고 사랑을 하고 나의 작은 공간을 온통 차지하고 몇 번이고 말을 했다. 사랑해. 왜 이말은 면역이 되지않는지... 나는 오늘도 무사히 우리가 사랑을 하고, 하루를 보내고, 아무에게도 상처를 주지않기를 기도한다. 그래서 홀로 남을 때 우리의사랑의 흔적이 남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것이 서럽기도 하고 가엽기도 하고 아프기도 해서 눈물로 흔적을 지운다. 그는 사랑을 하고 싶어서 나를 사랑한다. 나는 그래서 그에게 사랑의 대상이 되어준다. 그러나 어느날 그는 알지도 모르겠다. 그는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사랑을 하고 싶어해서 나를 사랑했다는 것을. 그러나 그 사랑을 다하고 나면 나만 남을 것이다. 나는 그에 대한 사랑을 담고 남아있을 것이다. 그가 없이... 그래도 이 봄, 그에게 사랑의 대상이 되어주고 그가 떠나갈 빈 자리를 견디기 위해 오늘도 흔적을 지운다. 햇살은 따사로웠고 그의 손길은 부드럽고 애정이 가득했으며 그의 입술은 나를 읽어냈다. 그는 사랑을 했고 그리고 자신도 미처 모르고 있는 큰 사랑 속으로 돌아갔으며 나는 혼자 그의 흔적을 지우며 지워진 흔적에 아파하고 있다. 그래도 안다. 이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을. 그리고 내일이면 또 다시 그는 비타미처럼 내게 사랑해라는 말을 들려줄 것이라는 것을. 그런 내일이 안와도 괜찮다. 그는 사랑을 했고 사랑하러 돌아갔고 나는 사랑을 담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