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판 된 책이다. 구할 수가 없어서 복사본을 얻었다. 그 복사본을 다시 복사해서 여럿 이웃들과 함께 공부했다. 하루는 딸이 서가의 책을 정리하다 얇은 복사본의 이 책을 버렸나보다. 작고 얇고 낡은 복사물이어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미리 이야기하지 못한 나의 불찰이었다. 그 책을 다시 구하고 싶은데 방도가 없었다. 지인들의 것을 다시 복사하자니 이미 공부하느라 낙서가 심했고, 필사를 할까 하다가 도서형태로 가지고 싶어 찾고 있었다. 수시로 중고서점을 뒤졌는데 드디어 중고서점에 한 권이 나왔다. 원래 책값의 8배의 가격이었다. 책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본능처럼 기뻤다. 얼른 주문했다. 『어른이 된다는 것』 데이비드 리초의 책이다.
이 책은 어른이 되어가기 위해 필요한 내적인 세계를 다루고 있다. 설명과 이해를 도울 사례도 절제된, 어른이 되기 위해 필요하고 중요한 것만 모아놓은 종합영양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 줄의 글을 읽고 하루를 꼬박 생각에 빠지는 날도 있었고, 펼친 한 페이지를 일주일간 펼쳐 놓은 채 생각에 잠길 때도 많았다. 얇지만 책을 펼치면 깊고 넓은 세계로 이어지는 터널, 해리포터의 런던 기차역 9와 4분의 3 승강장 같은 책이다.
이 책으로 여러 사람과 함께 공부할 때도 좋았다. 얇게만 보였던 170페이지는 수개월간 우리의 삶을 흔들며 수백 수천 페이지의 이야기를 끄집어내었다.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울고 웃던 시절이었다.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이 그냥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성숙되어가고 확장되어가며 깊어지는 어떤 것이란 것을 조금씩 느끼는 시간이었다. 그것이 어른이 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몇 계절을 그 책과 함께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 책은 더욱 내게 의미가 있었다.
주문한 책을 기다리며 며칠 설레었다. 언제 책이 오려나. 중고품이라 시간이 더 걸렸다. 길어진 시간이 너무 행복했다. 책이 드디어 도착했다. 아이가 선물을 받고 폴짝 뛰듯 나도 저절로 그랬다. 소포꾸러미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포장은 뜯지 않았다. 좀 더 설렘을 즐기고 싶었다. 하루 이틀. 기다리는 데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이 책만큼 설레는 책이 한 권 더 도착하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 대본이다. 2018년 텔레비전으로 방영된 이래 무려 해마다 서너 번씩 보아왔으니 열댓 번은 보았을 드라마이다. 아무 때고 그 드라마가 우리 집 벽지처럼 텔레비전 화면에 흘렀다. 중간에 띄엄띄엄 보던 남편도 내용을 모두 엮어서 이해할 정도가 되었으니, 남편이 ‘마누라 이정도 되면 정신과에 가 봐야하는 거 아닌가?’할 만 했다. 대본을 구하고 싶었으나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고 이벤트로 세상에 나온 대본은 고가로 판매되는 모양이었다. 나와 같은 열성팬이 많은 것이 틀림없었다.
‘구하라 그러면 구할 것이요, 없으면 만들라, 아니면 그것이 되어라’가 나의 삶의 방식 중 하나이다. 급기야 나는 드라마를 보면서 대사를 받아 적기를 하였다. 드라마를 보다가 멈추어 타이핑을 하고 다시 이어보기를 하다 멈추어 타이핑을 하다 보니 한 회의 드라마를 보는데 대여섯 시간이 걸렸다. 깊은 밤을 지나 새벽까지 타이핑하는 소리가 거실에서 울렸다. 그렇게 드디어 16회까지 대사를 적어 나만의 대본이 완성되었다.
그 이후에도 드라마를 계속 보면서 혹시 놓친 것이 있는지 채워 넣기를 하며 시간을 보낸 지 다시 몇 개월. 완성된 대본은 나의 소중한 재산이 되었다. 완성된 대본에 마냥 흐뭇해한 지 석 달이 지났다. 우연히 3월 15일 『나의 아저씨』 대본집이 출간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미 열나흘이 지나서 혹시 절판되었으면 어쩌나 초조감을 일어내며 인터넷 서점을 열었더니, 있었다. 살 수 있었다. 휴 다행이다. 주문했다.
한편으로는 왠지 억울한 느낌이 들었다.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오타도 잘 나오는 타이핑 솜씨로 받아 적기한 그 많은 날들이 허무하게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얼마나 미련한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고생해서 드라마 대본을 하나 엮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너무 쉽게 돈 몇 만원에 구입할 생각을 하니 배가 아팠다. 원래 사람은 그런 거다. 자기가 뼈 빠지게 고생해서 얻은 것을 남들이 쉽게 얻으면 아프다. 자기가 좋아서 열심히 해놓고도 혼자 억울하다며 방방 뛰는 내 모습에 남편은 웃는다. ‘마누라 안타깝고 억울하겠네.’ 하면서 슬쩍 놀린다.
타이핑하던 긴긴 시간, 허리 아프고 손목 아픈 것이야 힘든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동안 나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주옥같은 대사를 직접 받아쓰면서 마치 내가 글을 쓰듯 흥분했다. 섬세하게 보면서 화면 구석구석, 인물들의 표정 하나하나를 챙기며 나만이 발견한 것처럼 혼자 얼마나 감탄했던가.
『서울, 1964년 겨울』이란 작품이 문득문득 떠오른 순간이었다. 낯선 세 남자가 우연히 술을 마시게 되고 자기만 아는 세상 풍경의 한 조각을 나누는 대화가 있다. 사진처럼 정지된 생명력에 쓸쓸함과 동시에 보도블럭 사이에 핀 한 송이 작은 꽃을 본 것 같은 낯선 그 느낌을 기억한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김승옥 작가의 이 책을 읽고 가끔 나 혼자 그들의 짓을 따라했다. 나만이 아는 어떤 것 찾아내기. ‘나의 아저씨’ 드라마를 보며 나만의 대본을 만들며 나는 그 놀이를 마음껏 즐겼던 것 같다.
하루 간격으로 두 책이 왔다. 좀 더 기다리자. 좀 더 설레자. 조금만 더 즐겁자. 하루를 더 테이블에 두고 보았다. 작은 포장을 벗기니 가로 15cm, 세로 21cm, 두께 1cm의 170페이지의 작고 여린 그러나 열정의 붉은 색을 지닌 『어른이 된다는 것』 책이 나왔다. 와, 얼마만인가 반가웠다. 가로 18cm, 세로22.5cm. 두께 6.5cm의 『나의 아저씨』는 400페이지에 가까운 양장본 두 권이 두꺼운 케이스에 담겨 있었다. 고급스럽다.
두 권을 껴안고 아이처럼 좋아서 팔짝 뛰다가 몸을 좌우로 흔들다 두 책을 얼굴에 대고 볼을 부볐다. 책을 사고 이렇게 좋았던 기억이 언제던가. ‘아무도 여기에 라면냄비를 올리거나, 낙서를 하거나, 물방울을 튀긴다거나, 지저분한 손으로 만지면 안 돼. 모두 조심해 줘.’ 남편과 아들에게 책을 보여주며 나의 소중한 보물임을 알리며 보호를 요청했다. 여전히 두 책은 테이블 위에 있다. 내용은 이미 안다. 그래도 조만간 책장을 열게 되리라. 손을 깨끗이 씻고 책장을 열리라. 202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