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마음을 합한 말 뫔, 명상집『뫔』을 읽고 소개합니다.
『뫔』을 읽고 -김규성 시인 명상록-
시인은 언어의 마술사라고 했습니다. 시인인 저자 역시 108가지 명상을 눈, 귀, 코, 혀, 몸, 맘. 육부六部로 나누어 잠언과 같고 설법과 같은, 마음을 씻는 언어로 쉽고도 깊이 있게 기술했습니다. 백팔가지 명상을 복상復想하는 마음으로 한편한편 요약해서 올려보았습니다. 본문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기엔 한참 부족한 요약 글입니다.
눈
저자는 육부의 부마다 각각 열여덟 가지 명상으로 자아를 들여다보는 마음의 눈을 제시하고 그 첫 번째로 마음의 창으로 느끼는 자아를 다스려간다.
빛과 그림자 : 렘블란트의 그림 빛, 빛과 그림자는 서로를 드러내는데 필요한 상대다. 우리의 마음도 빛과 그림자로 이루어진 한편의 그림이다. 즉 마음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의 공존 처다. 서로 상반되나 상생해야 존재할 수 있다는 진리다.
성의 : 경제동물에서 경제 벌레로 변해가는 현대 사회의 일방적인 경제제일주의를 잠언 같은 언어로 가려내고 있다. 인간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할 경제가 반대로 인간을 경제의 한 부분적 하부구조로 전락시키고 있다고 지적한다. (經世濟民의 뜻의 반대로 經世啼民이 되고 있다.) 여기서 성 프란체스코의 옷을 떠올리며 마음의 자유는 청빈한 삶으로 누린다고 명상했다.
계영배(戒盈盃) : 절주배라고도 하는 술이 넘치지 않는 술잔 이야기와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사자성어로서 마음의 중심잡기를 명상
영과 마이너스 : 인도에서 처음 사용했다는 0이란 숫자와 마이너스 수학적 개념으로 마이너스를 사용한 동양은 대수를 발전시키며 유유자적 자연과 더불어 오고, 사용하지 않은 서양은 기하학을 발전시켜 문명의 영토를 확장시켰다는 것을 제시하며 음양의 조화를 이루지 못한 서양문명으로 심각한 지구촌이 되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 한다. 0이란 숫자로 무와 중용을 말하고 마이너스가 없으면 플러스도 없다며 모든 것은 상대성을 매개로 존재한다고 명상했다.
걸어보지 못한 길 : 이화경 작가의 『버지니아울프와 밤을 새다』에 나오는 인물들의 상식을 일탈한 비정상적인 궤적과 아문센, 리빙스턴, 고상돈과 같은 탐험과 도전의 길로 이룬 전인적이며 궁극적인 완성을 근원에의 귀환으로 보았다. 또한 성현들의 길을 시간과 공간이 따로 놀지 않게 정신의 벼릿줄을 온전히 다스린 아름답고 성스러운 영혼의 미학이라 명상했다. 백오십억 개의 뇌세포 중에 일부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썩혀버리는 삶을 가다듬어 마음의 길을 찾아 무한시공을 걸어가는 것, 그것은 뜨거운 열정에 이성을 반려해야 하는 것이라 한다.
빙판길 : 빙판에서 차가 미끄러져 자칫 죽을 뻔 했던 일로 삶과 죽음에 대한 명상을 한 글이다. ‘물질의 부는 영혼의 가난을 부르는 악마의 주술’이라 하고 있다. 법정의 무소유 실천을 우러르며 마음에서 탐貪, 진嗔, 치痴를 씻기를 꾸준히 해야 함을 떠올린다. 그러므로 내생來生이 없다 해도 이웃과 나누며 후회 없이 잘 사는 것이 잘 죽는 비결이라고 생각하며....
빈 항아리 : 비었다고 생각했던 마음의 항아리에 오만에 겨워 딱딱한 자폐自閉의 분비물로 가득 채워지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불가침의 영역인 마음을 비우기란 나약하고 성급한 인간의 능력으로는 가당치 않은 오만이다. 그러므로 마음은 비우는 것이 아니라 겸손, 진실, 사랑, 절제, 온유, 순결 등 새 식구로 채워야 하는 것이라 한다.
겉과 속 : 크든 작든 누구나 표리부동表裏不同하다. 겉과 속이 다르다. 그러므로 늘 자신의 마음과 하나 되어 즐기는 자세로 맑고 밝고 따듯한 평상심을 길러야 한다.
거울 : 끊임없이 흐르는 무형의 실체인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그 움직임을 종잡을 수 있다. 타자와 더불어 존재하는 자아는 사유가 아니라 공유인 것이다. 우주의 객관적 상관물로서만 존재하며 파악되는 자아다. 거꾸로 자아를 통해 우주를 들여다볼 수 있다. 내 안의 거울을 통해 진리의 표상이자 본체인 우주를 다시 발견하는 것이다. 마음은 곧 우주의 거울이다.
고삐 : “세상만사 마음먹기 달렸다”는 말이 고대부터 선진들이 무수히 들먹인 흔하디흔한 구호지만 그 진수를 제대로 깨우쳐 몸소 누린 이는 드물다. 자신을 대표하는 마음이지만 통제 불능이다. 달래고 붙들고 다듬으며 편하게 순하게 어여쁘게 가꾸어야 한다. 소를 길들이듯 마음도 길들여 고삐를 놓아도 제자리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
헛것 : ‘바다보다 큰 것은 하늘이요 하늘보다 큰 것은 인간마음이다’는 빅토르 위고의 말처럼, 또 ‘마음은 산천보다도 험하고 하늘보다 막막하다’는 장자의 말처럼 넓고 크고 거친 마음은 턱없이 바쁘고 걷잡을 수 없다. 무수한 타자에 불과한 것, 저마다 헛것을 두고 제 것인 양 침 튀기며 떠드는 것은 어리석음이다.
욕심 : 탐내는 마음,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을 삼독(三毒)이라 한다. 욕심을 버려서 마음을 비우고 투명하게 관리해야 한다.
작고 적게 : 에른스트 슈마허의 저서『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경쟁과 속도전에서 벗어나 행복을 위해 인간이 스스로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을 정도로 자그마한 경제규모를 유지할 때 비로소 쾌적한 자연환경과 인간행복이 공존하는 경제구조가 확보될 수 있다”를 인용, 거울의 먼지처럼 마음속의 먼지를 작게 더 작게 줄여가는 것이 자기완성의 가장 효율적인 지름길이라 했다.
정돈 : 어머니와 다른 자신의 정리정돈하지 못한 것들을 고백하며 잠시 빌려 쓰는 이승에서 마음의 옷깃을 여미고 물물마다 자국 없이 제자리에 돌려놓기를 바라고 있다. 바로 마음을 정돈하고 있다.
금수강산 : 양면성인 애국심이 패륜적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로 변질되거나, 독재자와 그 추종세력들의 정치목적에 악용됨을 비판, 약소국을 지배하는 추악한 패권주의 이기심을 맹목적 애국심으로 위장한 이성의 마비현상이라 나무라고 있다. 또 우리의 망국적인 지역감정과 집단이기주의의 추악한 면도 제시하고 아름다운 홍익인간 사상 동학혁명의 기조가 된 최재우의 인내천人乃天 강령을 심화한 사인여천事人與天을 들고 있다.
우리의 특성을 보면 부지런하고 정 많은 민족인데 반면으론 남 탓 잘하고 끼리끼리 모여 패거리를 이루어 불필요한 소모를 한다. 그러나『25시』의 작가 게오르규는 미래를 구원할 곳은 한국이라 했다. 차분하고 경건했던 우리 본디의 국민성을 높이 샀다.
흙과 백 : 흑과 백에 대한 시조로 포은 정몽주 어머니가 지었다는 시조와 이직이 지었다는 시조의 상대적인 내용에서 방원의 하여가와 포은의 단심가를 상기하고 겉과 속에 대한 명상을 유추한다.
평등 : 삼색기와 프랑스 혁명, 청, 백, 홍 삼색의 의미가 자유, 평등, 박애라며 자유와 평등의 길항을 들어 자유의 독과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평등을 말한다. 하나님 앞에서 모두 평등하다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도 기독교는 한때 정종유착으로 교활하고도 잔혹하게 부패권력과 야합 추악한 양면성을 드러냈다. 천편일률적 평등이나 성과적 평등이 문제점을 안고 있음을 밝히고 가장 바람직하다고 상생적 평등을 제시함.
울화 :『근사록近思錄』에 “분노를 누르기를 불 끄듯이 하라”는 구절을 인용하며 화를 참으면 화병을 갖게 된다고 말한다. 우울병은 그와 비슷하지만 반응은 다르다. 화병은 부교감신경계의 항진이 지나쳐 신체에 이상이 오지만 우울병은 교감신경계의 항진이 지나쳐 정신질환이 된다. 그러므로 근사록의 분노를 누르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결론이다.
귀
청각으로 느끼는 소리만이 아닌 마음의 귀로 듣는 소리에 대한 명상이다.
각설이 타령 : 각설리覺說理의 변형으로 중생들에게 영혼의 윤회를 깨닫게 하려는 불보살들이 전한 노래 각설이 타령에서 민초들의 고단하고 주린 삶의 애환이 담겨 있음을 이야기 했다. 마음도 그와 같이 고통과 슬픔을 쟁기 삼아 기쁨과 행복의 문전옥답을 일구는 것이라고 명상한다.
겨울 : 겨울은 무성음이다. 적멸이다. 소리를 빨아먹는 블랙홀이다. 아직 살아서 눈먼 욕망에 집착하는 생명체에게 보내는 신의 엄숙한 메시지다. 무명으로 왔다 무명으로 가는 것이 진정한 자기경영 아닐까 자문한다. 겨울은 유목의 정점으로 반죽음에 가깝다.
사소한 것 : 큰 것은 작은 것부터 시작한다. 사소한 거짓말이라고 아무렇지 않게 해대는 것은 크나큰 일을 낼 수가 있다. 키워야 할 것도 작은 것부터 키우지만 인격은 과감히 지우는 것부터 출발한다.
겨울연가 :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많이 한 미안하다는 말. 그래서 겨울연가라고, 사랑은 그런 것이라고 한다. 남녀의 사랑뿐 아니고 모든 사랑이 ‘미안한’ 그 마음 때문에 불멸의 생명력을 갖는다고 명상.
정체 :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사물의 대상, 즉 사고의 객관적 상관물이다. 그 매개를 통해서만 그 속내를 드러낸다. 무수한 경험으로 각인된 기억속의 사물을 불러내는 마음을 불가에서 ‘오온五蘊’이라 말한다. 감각, 개념, 지각, 표상 등 인식하는 마음의 활동에 육체를 합해 오온이 된다. 이 오온의 주류를 이루는 마음 또한 온전한 자기 것이 아니다. 영원불변이 아닌 일시적이고 가변적 존재이기에 더 소중하고 안타까운 것이라 사고한다.
기도 : 진심어린 기도는 마음을 정화하고 병도 낫게 한다. 요즘의 형식적이고 요행을 바라는 사욕적인 기도는 기도를 모욕하는 것이다. 기도는 신을 향해 두 손을 모아 드리는 손으로 하는 기도와 이웃을 위한 발품을 팔아 복을 짓는 발로하는 기도가 있다. 즐거이 베푸는 삶으로 하는 기도가 제대로 된 기도다.
비결 : 『성경』을 비롯해『주역』『격암유록』『정감록』등이 예언서를 들며 저자도 지구상의 자원고갈을 예언한다. 에너지 자원보다도 공해 없는 먹을거리의 고갈을 예언한다.
산책 : 산책하며 행하는 명상이나 사색을 든다. 명상은 영혼에 가깝다면 사색은 이성에 가깝다며 저자는 사색을 ‘본원적 귀향’이라고 한다. 마음의 정靜을 위해 몸의 동動을 빌리는 것이 산책이라 정의하고 있다.
소통 : 네델란드어를 모르는 프랑스 선생 자코토, 그에게 프랑스어를 배우는 네델란드 학생들 서로 언어를 몰라도 서로 소통할 수 있었던 것은 왼쪽은 프랑스어 오른쪽 네델란드어로 된 『텔레마코스의 모험』이란 교제로 소통하게 된다. 신과 인간의 소통은 자연이라는 통역이 필요하다. 자연은 외경으로는 사물의 집합이나 그 내면은 우리의 마음과 다름 아니다.자연의 뜻을 알아야 신과도 만날 수 있다.
속담 : 오랜 경험과 지혜가 담긴 속담은 어떤 명언보다 피부에 와 닿는다. 속담엔 마음에 대한 것이 많은데 헤아리기 어려운 마음을 헤아리도록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앎 : 머리만 아는 것과 가슴으로 전율하며 깨우친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난다. 곧 지식과 지혜의 분수령이다. 그냥 앎의 지식은 목전의 이익에만 어우러지기 쉽다. 본질적 자산인 지혜는 깊고 높고 넓은 진리와 한통이다. 백 가지 건성의 앎보다 한 가지 진성의 깨우침이 수십 배 더 차원 높다. 깨우침에 이르지 못한 어설픈 앎은 차라리 모르느니만 못한 경우가 많다. 반사회적인 유혹에 기생충처럼 이용당하기 때문이라고 명상한다.
인디언 : 청소년기에 일정기간동안 밀림에서 혼자 지내도록 하는 인디언의 자녀교육은 우주의 언어를 배우고 자연과 하나 되는 삶의 지혜를 스스로 터득하게 한다. 자연친화적 삶의 방식이 우리와 비슷한 아메리카 인디언, 우리는 ‘홍익인간’을 슬로건으로 한 인위적 소승수준인 반면 그들은 포괄적으로 우주인 대자연 위주의 대승수준이었다. 문명의 오폐수로 찌든 정신이 오히려 무지하고 미개한 수준이다.
좌와 우 : 언제부터인지 오른쪽은 옳은 것을 상징하고 왼쪽은 그른 것을 상징해온 우리 정서는 우측 우월주의 편향의 고정관념이 뿌리박힌 세상, 특히 우리 사회. 그러나 좌를 먼저 지칭하고 관직도 좌측이 우선이었던 조선 시대를, 지금의 언어도 좌와우를 말할 때 ‘좌우’라고 좌를 앞세운다는 점은 좌가 월등하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 몸의 좌우가 다 건강해야하듯 사회도 좌든 우든 모두 공존해야 한다는 깊고도 강하게 진리를 드높이 세우는 명상이다.
주의 : 마음을 놓치는 것이 부주의다. 그러므로 부주의는 자기를 도둑맞은 것이다. 우리 삶이 곧 주위와 부주위의 싸움이다. 마음이 없으면 몸도 주인 없는 집처럼 방치된다. 마음아 나 살려라 하고 그 뒤춤을 꼭 움켜쥐고 살아야한다. 착하고 맑고 밝고‘따듯하고 고요하고, 사랑이 가득찬 곳에 자리 잡길 원한다.
평화 : 생존경쟁이 생존투쟁으로 변하며 낙오자들의 자살이 상상을 뛰어넘는다. 이는 너나할 것 없이 이웃을 절망으로 빠뜨리는 서바이벌 게임에 미쳐가고 있는 것이다. 오직 강자만의 천국이 되어가는 세상. 공멸하기 전에 경쟁심이 아닌 평화심으로 살아야 모두 제자리로 돌릴 수 있다.
고독 : 산장의 한겨울은 적막으로 고독을 불러온다. 고독은 마음의 집이며 자아의 거울이기도 하다. 고독의 전령인 겨울은 고요히 자신을 되찾게 해주는 내밀한 축복의 계절이다.
긍정 : 잠시 어둡다고 빛을 다시 보지 못할 것처럼 태양의 존재조차 부정하는 것은 지나친 왜곡이거나 편벽이다. 봄을 대비하지 않고 종자조차 먹어치우는 겨울과 바리바리 씨앗을 준비해두고 봄을 기다리는 겨울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 슬픔과 암울함과 고통이 있어도 아름답고 즐겁고 재미난 일들이 상존하는 세상이다. 맑고 밝은 긍정으로 충만한 마음이 곧 천국이다.
내일 : 인디언과 문명인의 차이는 각각 현재와 미래의 가치를 두는 시간관에 있다. 순환적 시간관을 자연을 통해 몸소 익힌 인디언에겐 현재는 영원의 동의어다. 문명인의 시간관은 미래를 향한 전진만이 지고의 가치기준이다. 현재의 중요성을 깨우치고 나면 필요 이상으로 소유한 자들은 미필적 고의의 죄인임을 알 것이다. 문명인은 미래의 몫을 위해 이웃의 현재를 도륙하고 있는 것과 같다. 천국이나 극락은 마음의 허락 없이 불가능하기에 결코 미래의 것이 아니다.
코
세상에는 마음을 자극해 유혹하는 미취迷臭나 기분을 망치는 악취惡臭가 많이 존재한다. 마음을 굳게 세워야 어지럽게 하는 냄새를 이겨낼 수 있다.
미신 : 미신을 끔찍이 배제한다는 종교 속에도 지독한 미신이 존재한다. 성경을 오독誤讀하고 세 아이를 때려죽인 목사부부의 이야기를 서술한다. 종교를 떠나 일상의 삶속에도 미신의 작용이 많다. 자신의 내면에 미신이 자리 잡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쓰레기 : 몸의 건강은 잘 먹고 잘 배설해야 한다. 즉 뱃속을 채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비우냐도 중요하다. 뱃속의 오물뿐만 아니라 바깥의 쓰레기들도 우리가 배설한 오물과 같다. 하루만 버리지 않아도 온 도시가 쓰레기 천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마음의 쓰레기다. 마음의 쓰레기를 버리는 일이 가장 큰 일중 하나다. 현대인 모두의 십자가인 마음의 쓰레기다
마지막 후회 : 오늘이 삶의 마지막 날이라면 무엇을 가장 후회할까? 자신의 능력을 다 발휘하지 못한 것을 가장 후회할 것이라고 명상했다. 매혹의 처녀지와 같은 자신의 마음을 방치하고 남의 것만 기웃거리는 슬픈 광대의 피상적 삶에 목을 매온 것을 후회한다고 했다.
물과 불 : 물과 불은 특성을 서술하며 그 교훈을 이야 했다. 끊임없이 외부를 지향하는 것만 물과 불의 공통점이고 나머지는 모든 면에서 상대적이다. 불은 위로 위로만 솟으며 태울 감이 있어야만 타오를 수 있는 불은 의타적이다. 반면 아래로만 향하는 물은 스스로 흐른다. 물은 늘 존재하지만 불은 늘 다시 태어난다. 마음을 다스리는 일도 안(자신)의 안정과 바깥(이웃)의 화합을 이루는 물과 같이 자주와 공생적 지혜를 닮아야 한다.
청정 : 마음은 비밀이나 흉계를 두는 창고가 아니다. 원래 아무 것도 담겨 있지 않았던 청정지역이다. 즉 감출 것도 보여줄 것도 없는 명경지수明鏡止水였다.
미인 : 모든 업보는 마음에서 온다. 마음이 고우면 얼굴도 예뻐진다. 마음 씀씀이에 따라 그 사람의 생김새도 형성한다. 그러기에 몸과 마음은 서로 떠나서 살수 없는 것이다.
비교 : 질투가 침입하면 평상심은 속수무책으로 망가진다. 세익스피어의 말처럼 자신의 ‘없던 결점도 질투가 만들어낸다.’ 그 질투는 비교에 의해 생긴다. 객관적 가치를 도출하는 비교가 아니다. 시키지도 않은 혼자만의 사적이고 일방적인 비교다. 지나고 보면 부질없고 부끄럽기 짝이 없는 졸렬한 소심증의 자기 파괴적인 난동일 뿐이라고 말한다.
겸손과 비굴 : 겸손은 아래 깊숙한 곳에 자리한 자궁처럼 무수한 생명을 품은 강은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겸손하게 흐르며 자신을 정화한다. 겸손은 자신의 실상을 되살피고 갈고 닦는 지혜로운 자기관리다. 오만은 위에서 눈 내리 깔고 아래만 보니 자기 발밑조차 제대로 볼 수 없다. 그 오만보다 더 나쁜 것이 비굴이다. 비굴은 교활하게 숨어서 오만의 몸집을 키운다. 겸손은 진실과 정의를 지닌 주체인데 오만의 졸개로 타성적인 비굴은 악마와 교활한 밀거래로 동업한다.
버리고 챙기기 : 속이 비거나 찬 것에 대한 인식으로 사람의 됨됨이를 평가한다. 그러나 선현들이 채근하는 속(마음) 비우기는 탐욕과 잡념, 어리석음과 집착에 대한 경계다. 그 두 가지를 함께 해보면 사람의 속엔 채울 것이 따로 있다는 뜻이란 것을 알 수 있다. 마음속엔 지고지순한 이상향이 저절로 채워져야 한다.
사랑 : 성인들은 모두 인간의 따듯한 마음을 일깨운다. 예수, 석가, 공자, 소크라테스, 마호메트 등 성자들의 궁극적인 말씀은 모두 사랑이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따뜻한 체온과 함께 무궁무진한 에너지 사랑을 품고 있다. 상대를 불문하고 그것을 베풀고 나누어야 한다.
상상력 : 아인슈타인은 ‘상상력은 지식보다 더 중요하다’고 했고 전구는 에디슨의 알을 품었던 상상력이 낳은 것이다. 미지에 대한 상상력은 탐험을 유혹한다. 그 유혹에 빠져 고도의 영혼을 지니고 고도의 문명까지 누리는 상상의 공간으로 여행해 본다.
상처 : 우리는 기억하지도 못하는 상처들이 무의식의 심연에 박혀 있다가 별별 해괴한 모습으로 마음 밭에 자라난다. 정신분석학자들도 난감히 여기는 이것들은 자신 스스로가 외치며 뽑아버리는 수밖에 없다. 완전히 뽑힐 때까지 ‘아니다!’라는 명징한 각인을 뽑아낸 자리에 심어야 한다.
엄마의 옷 물 : 볼리비아 소금사막 부근 고산지대에 사는 토착민 몇 가구 중 엄마가 칠레로 돈 벌러 간 다섯 아이의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는 방법이 엄마의 옷을 빤 물을 마신다는 이야기다. 그들에게 편지나 전화나 화상통화 등 문명적 접촉보다 더 효과적인 까닭은 엄마의 냄새를 대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자기만의 것으로 마음이 통해야 하는 것이다.
호흡 : 일상적으로 늘 들이, 내 쉬는 호흡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숨 하나에 목숨의 경각이 달렸다는 인식을 해보면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자연과 호흡을 잘 맞추면 안정과 평화는 저절로 주어진다. 그러기 위해선 인류가 버린 자연과의 일체감을 어서 되찾아야 한다.
가난 : 성서의 산상수훈에 나온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의 마음이 가난한자를 놓고 진의를 파악해본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의미는 물질에 대한 욕심이 없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그 해석대로면 가진 것을 베풀어야 하는데 가난한 자에겐 베풀 것이 없다. 갈수록 가난은 견디기 힘든 악조건이다. 부자도 옛날보다 행복하지 않다.
호수 : 바다가 태풍이라면 호수는 그 태풍의 눈이다. 바다는 거칠지만 호수는 맑은 거울이다. 주변의 사물들을 거울처럼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를 찾는 것의 궁극은 자기완성이다. 맑고 고요한 마음이 곧 자신의 진짜 거울이다. 마음이 맑고 고요하면 해인삼매海印三昧의 경지인 돈오頓悟에 이르기 수월해진다.
조화 : 안과 밖, 너와 나, 몸과 마음, 인간과 자연의 온전한 소통을 이르는 것이 조화다. 완전한 혼연일체는 지극한 소통의 풍경이다. 진정한 하나가 된 자타공유의 조화 속에서 맛보는 기쁨이야 말로 극락이나 천국의 실상인 것이다.
허용 : 우리는 타자의 욕망에 예속된 포로들이다. 상식이니 지식이니 합리적이니 하는 것들 모두 세상의 요구에 물든 타자의 욕망에서 파생된 것들이다. 세상의 요구에 물들지 않은 나만의 것은 무엇일까? 타자의 욕망으로부터 해방되어 내면 깊숙이에서 우러나는 천연의 감동에 취해야 한다.
혀
손자병법 : 공자와 석가와 소크라테스가 활동하던 시대. 춘추전국시대 손무의『손자병법』 오기의『오자병법』손빈의『손자병법』 모두 손자병법으로 묶는 경우가 있는데 각각 분리해야 맞다. 손자병법의 손무보다 오자병법의 오기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출세를 위해 아내를 죽이는 천륜을 저버린 오기의 최후는 비참한 타살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마음속에 생명의 벼릿줄인 그 천륜이 자리 잡고 있다. 누구나 하나의 자연이란 증명이며 마음의 진수로서 어떤 출세와도 바꿀 수 없는 지고의 가치다. 최고의 손자병법은 자신의 마음에 최정예주력부대를 주둔시키는 것이다.
경쟁 : 우리는 행복지수의 임계점인 선의의 경쟁 단계를 이탈한지 오래다. 하부구조를 지탱하는 서민층은 이미 생존경쟁의 한도를 넘어 생존투쟁 중에 있다. 그 하부구조가 무너져버리면 남은 기득권층도 견딜 수 없게 된다. 그럼에도 사회지도 기득권층은 ‘만년음지의 절망인구들’을 더 늘리자고 안달이다. 경쟁으로 독차지하기보다 협력으로 함께 나누어 소박하게 누리는 삶으로 바꾸어 나가야 사회가 살 길이다.
공공의 것 : 공공의 것보다 개인의 것을 주인 몰래 손대는 행위를 더 부끄럽게 여긴다. 그러나 개인의 것은 한 사람에게 짓는 죄지만 공공의 것은 다수에게 짓는 죄다. 우리의 마음도 네 것 내 것 따져 혼자 자기 것만 챙기는 사심의 먼지보다 여럿이 함께 일구고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초심이자 본심이다. 공공의 마음은 공심公心 즉 우주의 마음이다.
참회 :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참회하는 것은 성스러운 내일이다. 인류 역사의 태반은 참회의 누적이자 반복이라 할 수 있다. 후회를 하고 되풀이하는 것은 참된 참회가 아니다. 그 타성의 뿌리를 뽑는 것이 곧 참회다. 고해든 참회든 마음을 다스리는 가장 현대적인 행위이자 가장 미래적인 행위이다. 간곡하고 깊을수록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정의正義 : 신앙인에게 정의가 사랑만큼 중요하다고 한 피에르 신부, 그는 자살을 기도했던 전과자 조르주에게 인생의 극적 반전을 하도록 동기를 부여해주었다. 집이 없어 얼어 죽어가는 아이들이 얼어 죽지 않게 하는 것은 어떤 법보다 우선이다. 즉 천부인권은 어떤 법보다 우선하는 절대법이다. 연민과 긍휼, 공공성을 원천으로 하는 정의는 인간의 마음 중에 가장 초발심으로, 말려서도 안 되고 말릴 수도 없는 지고의 가치다.
거짓말 : 마음잡고 자신을 갈고 닦는데 거짓말만큼 끔찍한 적敵은 없다. 하찮은 거짓말이라도 그동안 쌓아온 노력을 일거에 수포로 돌리는 경우가 많다. 사소한 거짓말일수록 경계해야 한다.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필요로 한다.
언어 : 사람은 그 언어와 이름을 바르게 하는 데서 사회적 가치와 자격을 지닐 수 있다. 뜻이 사라진 소리만의 난장판은 말초적이고 표피적인 해방감은 잠시 누리겠으나 스스로 걷어치운 중심과 무게의 결핍으로 무중력 수렁에 빠지게 된다. 소리와 뜻이 함께 해야 비로소 언어다운 언어가 된다. 소리가 몸의 발산이라면 뜻은 마음의 발현이다. 몸과 마음 둘 중 어느 것이 먼저거나 나중일 수 없다.
예방 : 편작은 춘추전국시대 전설적인 의성이다. 그가 한말 중 큰형은 병이 나기 전에 고치고 둘째 형은 초기에 고치고 자신은 환자가 고통을 호소해야 고친다며 큰형의 의술이 최고라 했다. 그만큼 예방이 중요하다 고 강조한 말이다. 그 예방에 대한 대표적인 기억이 우두다. 마음의 병도 예방이 필요하다. 역경에 처했을 때는 깊고 넓고 탄탄한 정신의 면역력을 기르고 평소에는 꾸준하게 흔들리지 않고 여유로운 평상심을 길러야 예방을 할 수 있다. 마음의 천연두 허상을 꿰뚫어보는 마음의 눈을 지니면 그 예방의 효과가 가장 크다.
웃음 : 행복할 때 웃게 되는 웃음을 웰리엄 제임스는 ‘사람은 웃음으로써 행복하다’고 뒤집어 말했다. 우리 조상들도 정초에 벽 안팎으로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 글귀를 붙였다. 즉 웃음과 행복은 뗄 수 없는 동의어였다. 그 웃음은 마음이 시켜야 한다. 마음에게 웃자고 자꾸 주술을 걸어야 한다. 웃음은 마음속 젖은 그늘을 말리는 쾌적한 햇볕이다.
위선과 위악 : 톨스토이의 위선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위악에 끌리는 이들이 더 많다. 위선은 기만으로 보이는 것에 반해 위악은 거칠지만 솔직함으로 비치기에 거짓의 혐의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미완에서 출발한다. 선에 이르기 위한 갈등과 시행착오를 겪는 것까지 위선으로 호도해선 안 된다. 그러나 위악은 선 콤플렉스의 변종이다. 지고의 선에 이르기 위한 미완의 노력을 무참히 회화 화하는 것은 횡포요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이다. 위선이나 위악이나 거짓 위僞자다. 즉, 위선은 선을 가장한 사기인 반면 위악은 솔직함을 가장한 하나의 테러다. 위선이든 위악이든 자신이 아닌 함부로 들인 객이다.
유머 : 유머는 딱딱하고 삭막한 생활을 부드럽게 마사지 해주는 윤활유다. 밝고 가벼운 마음이어야 유머가 놀러와 자리 잡고 통할 수 있는 것이다. 경쟁주의 사회의 각박한 삶 속에선 더더욱 꼭 나누어야 할 유머다.
작은 놈 : 말을 못한다고 바보처럼 여긴 ‘작은 놈’의 ‘천재적 실용’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훌륭한 변설은 눌변과 같다.’는 노자의 말을 상기하면 말하는 능력에 따라 사람을 가리는 짓은 부끄러운 풍토다.
비평 : ‘부처는 부처를 알아보고 중생은 중생만 알아본다.’는 말이 있다. 자기 수준대로 남을 평가하기 쉽다는 말이다. 당사자에게 호평하기보다 비평하기가 더 어렵다. 비평일수록 겸허하게 듣고 자신을 가다듬어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남의 평에 연연하지 말고 남을 평하지도 않으면 마음의 평화를 이내 얻을 수 있다.
착한 말: 한 입에서 나와도 침과 말은 다르다. 침은 뱉으면 버리는 것이나 말은 뱉으면 살아서 퍼져나가는 것이니 침을 뱉듯이 말을 함부로 해선 안 된다. 말을 할 때 중요한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 거짓말을 하지 말 것. 두 번째 말을 꾸미지 말 것. 세 번째 말을 너무 많이 하지 말 것. 마음이 진실하고 알차고 따듯해야 착한 말이 나온다. 말 수를 줄이고 행동으로 말하고 수십 번 고르고 걸러서 말하는 것이 마음을 다스리는 최고의 수행이다.
말수 : 말은 마음의 화살이다. 입이 화근이란 말이 있지만 겉치레조차 입이 아닌 마음에게 책임이 있다. 그렇다고 신중을 기하기를 너무 하면 마음이 파업하는 수가 생긴다. 말수를 줄이는 것이 좋다 마음의 절대경지인 고요한 마음도 말수를 줄이는 것부터 시작한다.
투사와 전이 : 투사와 전이는 무의식 상태에서 일어나 대상을 외부로 옮긴다는 점에서 한편이다. 그러나 전이는 대상에서 대상으로 옮기는데 반해 투사는 자아에서 대상으로 옮긴다는 점이 다르다. 전이를 통해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이나 사고들을 새로운 대상에게 옮겨 붙임으로서 해소하며,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인간관계를 개척할 수 있다. 투사는 자신의 마음과 인격이 추악해지는 행위다.
동정상선 무아불공動靜常禪 無我佛供 : 먼저動靜常禪는 “앉으나 서나 바쁘나 한가하나 선禪을 하라.”는 뜻이고 無我佛供은 “사가 아닌 공을 위해 불공하라” ‘군자는 혼자 있을 때를 조심하라’ 말이 있는데 번뇌 망상과의 싸움을 말한 것이다. 마음을 가꾸는데 최대의 적은 바깥에 사로잡힌 자신이다. 가신의 이기를 버리고 우주의 자아에 몰입하는 것은 자아의 완성을 이루는 것이다.
동기부여 : 어머니를 위하다 가족, 친구, 이웃으로 영역을 넓혀나간 나눔. 남의 기쁨을 자기 즐거움의 동기로 작용한 것이다. 심리학으로 외재적 동기에서 내재적 동기로 정착되었다. 참교육은 대가를 바라는 외재적 동기가 아닌 스스로 행하는 내적으로 동기화시킬 수 있도록 조건을 심어주는 것이다. 마음은 동기의 산실이자 처소다. 지속적으로 늘 마음을 다독여 내재적 동기를 일구어야 한다.
몸
한중망閑中忙 : 산중 생활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자연과 말을 트기 전엔 사방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하찮은 미물과도 공동운명체적 질서의식을 나누어야 한다.특히 마음관리는 고난도의 치밀성을 요구한다. 안일과 평화, 자유와 자율의경계가 모호하다. 저잣거리의 휴식이 망중한忙中閑이었다면 산중은 한중망閑中忙이 제대로 이루어지는지 살펴야 한다. ‘무의식적 산만’에 흐르지 않는지 고도의 검증이 필요하다.
과로 : 어떤 분야의 일에서도 과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육체적 과로는 물론이고 정신적 과로도 삼가야 한다. 천재는 일반인에 비해 정신건강이 좋지 않은 이가 많다. 천재라는 영예 때문에 머리를 지나치게 혹사하기 때문이다. 머리를 쓰는 것은 곧 마음을 쓰는 것이다. 마음은 부리는 것이 아니라 모시는 것이다. 마음을 너무 부리다가 멀쩡했던 건강을 망칠 수가 있다.
근검 : 먼지처럼 가까운 이웃도 없다. 먼지가 제일 좋아하는 곳은 누더기다. 함부로 다루는 옷은 먼지가 오래 달라붙어 있어도 괜찮기 때문이다. 반면 먼지가 가장 두려워하는 곳은 스님의 단벌 납의다. 납의는 자주 빨기 때문이다. 수행의 일환인 납의 단 벌로 겉이 깨끗한 만큼 그 속의 마음도 깨끗해지려는 의미다.
뫔 : ‘건강한 몸에 건강한 마음이 깃든다.’ 손톱 밑에 비접만 들어도 마음도 덩달아 매우 불편하다. 마음을 온전히 하려면 몸을 잘 돌봐야 한다. 몸과 마음의 합작이 곧 건강의 비결이다. 그래서 걸핏하면 겉도는 몸과 마음을 따로 놀지 않게 하나의 낱말로 묶어보았다. “뫔”이라고‥ ‥
본능 : 탈무드에 ‘연애중인 딸을 집에 가두기란 백 마리의 벼룩을 안에 넣기보다 어렵다.’는 구절이 있다. 사랑은 무섭다. 본능의 사주를 받은 사랑일수록 무섭다.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닫게 하고, 감정에 사로 잡혀 이성은 도무지 쪽을 못 쓴다. 몸도 마음도 불덩이가 된다. 본능은 ‘개체유지 본능’과 ‘종족유지 본능’으로 나눈다. 본능과 감정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다. 그러나 결국 마음의 평화는 이성과 본능의 조화에 달렸다. 이성이란 사막과 감정이란 늪을 경계하는 중용의 지혜는 늘 마음 밭을 신선하게 가꾸는 이의 것이다.
손질 : 감정의 변화무쌍한 안색을 희로애락으로 그린다. 본래 『예기』에서 희喜, 노怒, 애哀, 구懼, 애愛, 오惡, 욕欲으로 칠 등분하고 사단칠정이라 했던 칠정이다. 그것을『중용』에서 압축한 것이 우리 입에도 자주 오르내리는 그 희로애락이다. 감정의 발자국을 그릴 때 몸을 사용한다. 입이 째진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다. 가슴이 찢어진다. 온 몸이 날아갈 것 같다. 등이다. 이런 거친 감정의 모습을 이성으로 적당히 손질한다.
수승화강 : “마음에 욕심이 생기면 물이 고인다. 보아라 진수성찬을 생각하면 입에 침이 고이고 어여쁜 여인을 생각하면 음근淫根에 물이 고이지 않느냐“ 부처의 말씀이다. 그 물이 막혀 순환되지 않을 때는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이 위로 솟는다. 한방에서 수승화강水昇火降 이란 처방이 있다. 즉 머리는 차게 하고 발은 따뜻이 하는 두한족열 頭寒足熱 치료법과 한통속이다. 수승하강은 선가에서도 번뇌 망상을 끊는 방법이니 머리가 맑아져 세상이치가 저절로 보인다.
안일 : 안일은 게으름과 교만의 합작일 경우가 많다. 게으름이 교만을 부추겨 이뤄온 것을 까먹게 한다. 그러므로 안일은 죄악의 사촌이다. 선가에서도 잡념 못지않게 무기無記를 경계한다. 하지 말아야 할 일에는 부산떨고 해야 할 일에는 소홀한 것도 안일이다. 단 것은 기를 쓰고 밝히면서 쓴 약을 멀리 하는 것도 안일이다. 몸은 절간에 두고 마음은 뽕 밭에 간 것도 안일이다. 안일은 명증이요 자기 파괴며 자포자기의 지름길이다.
절제 :『업보차별경』에 건강하게 태어나는 은혜의 동인 열 가지 선업이 있다. 첫 번째부터 네 번째까지의 ‘때리지 않는 것’은 꼭 폭행만을 이르는 것이 아니다. 비난, 모함, 멸시, 증오 등 직, 간접적인 잠재적 폭력까지 포함한다. 폭력은 세상의 건강을 해치는 원흉이다. 선업 중 마지막의 ‘음식을 절도에 맞게 먹는 것’이 두드러진다. 자기 몫만 먹고 남의 몫은 건드리지 말라는 뜻이다. 식욕이 본능이라면 절제는 이성이다. 이성은 이럴 때 마음의 주인 노릇을 제대로 하게 한다.
첫걸음 : ‘풍요속의 빈곤’이란 반사회적 역설인 시사상식이 더 심화되어간다. 예수, 석가, 그 제자들은 물질은 가난해도 마음은 풍요로워 물질의 가난을 해방했다. 반대로 후예들은 물질은 풍요한데 마음이 가난하다. 그러나 풍요한 물질은 마음의 가난을 부채질하고 본연의 인간성을 타락시키고 구속한다. 농경사회의 가난보다 산업사회의 가난은 몇 배나 더 가혹하다. 부자들의 마음이 가난 하지만 ‘마음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의 가난과 완전히 다르다. 그들의 가난은 심각한 도덕불감증이고 영혼의 중병이다. 현대사회를 무한경쟁 사회라 한다. 그러나 무한경쟁은 전쟁 중에서도 가장 고약한 전쟁이다. 글로벌기업군이 된 경제인은 한국인이라기보다 다국적인이다. 그 다국적인들을 위해 한국인들의 희생하는 것이다. 무한경쟁속에 끊임없이 경쟁해야하는 다국적인들도 좋지만은 않다. 그 무한경쟁의 전투는 승자든 패자든 모두 가난의 덫에 빠지게 된 자승자박인 것이다. 물질에 쏟는 정성과 노력의 반만이라도 마음에 쏟는다면 세상은 몰라볼 만큼 행복하고 평화롭게 달라질 것이다.
최선의 기술 : 지금까지의 물질문명은 대무분 에너지 자원의 과소비와 치명적인 공해에 의해 발달해왔다. ‘문명의 그늘’을 더 이상 방치하기엔 너무도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우선 달콤한 곶감만 먹다보니 문명의 일방적 횡포를 견디다 못한 자연이 응징하고 나선 것이다. 문명의 반자연 지식을 친자연 지혜로 전환해야 한다. 한국과학기술 평가원이 내 놓은 열가지 미래유망기술은 친자연 지혜로 전환하는데 기대할만 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좋은 기술은 마음을 다스리는 기술이다. 문명의 발달에 밀려 심각하게 퇴화한 정신을 빨리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한다.
효도 : 요즘은 거론하기 겸연쩍을 만큼 효도란 단어가 세간의 입언저리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부모의 자식 사랑은 여전히 간곡하게 이어지고 있다. 이성을 초월하여 내재하는 생명체 본연의 보편적 본능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자식의 부모에 대한 효도는 이성과 감성과 의지의 조화로운 작용이다. 진실한 효심은 지극한 마음이다. 사심 없고 열린 마음이다. 따듯하고 경건한 마음이다. 감사하고 받드는 마음이다. 안타까워하고 어여쁜 마음이다. 기쁘고 건강한 마음이다. 부모에게 베풀면 효심이고 이웃과 인류에게로 확대되면 우주심이다.
건강 : 인간의 보편적 절대 가치인 자유, 평화, 행복 등도 건강한 마음이 필수적인 요소다. “심신의 건강”이란 말처럼 몸과 마음 모두 건강하려면 ‘자기정성’을 가장시급한 일과로 여겨야 한다.
헌신 : 사랑은 상대에 대한 마음 씀씀이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주고 싶은 마음뿐이다. 받는 것이 있다면 상대에게 즐겁게 베풀고 얻는 기쁨일 것이다. 거짓 사랑은 욕망과 어리석음을 두 날개로 거느리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철새의 여행이기 쉽다. 사랑은 우리 마음의 나들이다.
현재 : 누구나 자신이 태어나는 날짜도 죽는 날짜도 알 턱이 없다. 자신의 낳고 죽음에 자의적 간섭을 전혀 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처음도 끝도 자신의 의지가 조금도 반영되지 않는 생이 자기 것이라 할 수 있는지? 시작도 끝도 모르고 타의의 타의에 의한 타의를 위한 행군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오늘이다. 하루살이에 지나지 않는 짧은 시간이나마 온전한 자기 시간이다. 그러므로 현재를 자의로 누려야 한다. 과거와 미래에 저당 잡힌 현재를 과감히 해방해야 옳을 것이다.
혹사와 방기 : 몸과 마음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다. 몸이 아프면 마음이 불편하고 마음이 아프면 몸이 고생한다. 마음도 몸처럼 혹사하면 병난다. 몸의 과로도 피해야하지만 마음의 과로는 더더욱 무섭다. 그렇다고 마음을 쓰지 않고 너무 편히 놔먹이는 것도 좋지 않다. 잡념이 끓거나 무기력하게 퇴화한다. 선가에서도 화두를 너무 조급히 들다가 병이되는 경우를 경계한다. 또 화두를 놓지고 긴장을 잃은 경우를 무기라고 더욱 경계한다.
훌륭한 일꾼 : 마음이란 공간에는 여러 식솔들이 산다. 마음의 넓이와 깊이를 헤아릴 수 없듯이 그 마음의 식솔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식솔 가운데 제살붙이도 있고 불청객도 있다. 씀씀이와 됨됨이가 남들에게도 인정받으면 제살붙이 마음이다. 그 제살붙이를 잘 받들어 모시고 잘 부려야 한다. 그 마음은 곧 훌륭한 일꾼이기 때문이다.
희망하기 : 겨울은 봄의 예언이고 전령이다. 절망하고 죽으려다 발밑을 보고 희망을 잡아 작은 조개 바지락 양식을 하게 되었다는 초로의 이야기로 희망을 강조한다. 희망은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천부인권이며 평생의 천록天祿이다. 우리 마음속엔 희망과 절망이나 실망이 동거하며 치열하게 영역싸움을 한다. 불청객인 절망이나 실망을 먹여 살리느라고 희망을 챙기는 것에 소홀하면 안 된다.
맘
평상심 : 평상심과 초심을 놓지 않고 일의 가닥을 잘 추리면 어려운 일도 쉽게 해결 할 수 있고 큰일도 작은 일처럼 처리할 수 있다. 사물이나 사건의 본질만 제대로 꿰뚫는다면 태산처럼 어렵고 큰일도 물 흐르듯 결 따라 처리할 수 있다. 불필요한 생각과 욕구를 줄이고 최소한의 필요만으로 일사분란하게 밀고 나가야 한다.
터 가꾸기 : 마음은 무슨 색깔일까? 무슨 맛일까? 어떤 모습일까? 그 문제에 도전한 맹자와 순자는 선악 설을 내었다. 그 둘은 마음씨를 바르고 착하게 가꾸자는 결론에 일치시킨다. 마음은 밭이다. 잘 가꾸면 자기의 마음 밭에 천국을 건설하게 될 수도 있다.
겸손 : 교만은 자신의 가장 무서운 적이다.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볼품없고 해로운 허상이 교만의 실상이다. 교만과 겸손은 하늘과 땅차이다. 마음을 닦는데 교만만큼 해로운 게 없고 겸손만큼 고마운 게 없다.
내실 : 마음은 곧 보화요, 주인이요, 천국의 열쇄요, 우주의 축도요, 생사의 진원지이다. 그 무진장의 재산을 누구나 다 고이 간직하고 있다. 그 마음을 얼마나 잘 가꾸고 모시느냐에 따라 천국과, 평화와, 자유와, 진정한 부자를 이룰 수 있다.
중심 : 부처는 국도수행 중 깨닫고 이른 첫 마디가 ‘중도’였다. 공자도 현실과 이상의 조화로운 경지인 주용을 가르쳤다. 천평칭天平秤 저울은 한쪽으로 기울기는 쉽지만 중심을 잡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번 균형이 잡히면 가장 안정된 자세가 된다. 사람도 중심을 바르게 해야 몸의 벼릿줄인 척추에 무리가 안 간다. 어떤 사물이든 중심의 역할과 효용이 그만큼 중요하다. 마음도 초심과 본심이 늘 근본인 중심에 있다.
배려 : 상대를 구속하지 않으며 열정을 쏟는 것이 가능할까? 상대의 잘못 아홉보다 내 불찰의 하나를 탓하는, 상대가 저지른 잘못을 함께 책임을 지며 아파해본 적이 있는지? 사랑은 가능한 모두를 아우르는 축제요 예술이며 신앙이다. 사랑엔 ‘진정한’이나 ‘진실한’ 따위의 수식어가 붙을 필요 없다. 그 자체만으로 지고지순한 경지이기에....
무의식 : 프로이트는 ‘의식의 저변에 무의식이 깔렸다’고 했다. 또 ‘의식은 무의식의 빙하에 드러난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유식론에선 빙하를 일곱 계단(말나식)을 지나 여덟 계단(아뢰야식)까지 파고 들어가 세분하고 있다. 우리가 어렴프시 느낄 수 있는 부분은 새 발의 피다. 그러나 마음을 다잡고 마음공부를 해야 한다. 마음 밭을 잘 일구는 것이 마음공부다.
불안 : 줄여서 기우라 하는 고사성어 기인지우杞人之憂가 있다. 괜히 쓸데없는 걱정을 할 때 이르는 말이다. 이는 무지 탓이다. 무지는 미신, 근심, 편벽, 오해, 부화뇌동을 낳는다. 소크라테스처럼 자신을 제대로 안다면 하나같이 부질없는 것들이다. 자신을 아는 것은 우주의 열쇄를 찾는 지름길이다.
심리 : 서양에 보다 학술적으로 정신세계를 집대성한 심리학이 있다. 정신분석학도 심리학의 한 갈래다. 그러나 세계는 정신에 대한 정의가 오리무중이다. 오히려 정신이 옛날보다 퇴화되었다. 옛날엔 자연과 더불어 너나없이 해맑은 영혼을 지녔기에 침묵만으로도 소통이 자유로웠다. 인류는 몸이 즐겁고 편안하기 위해 마음을 불편하게 닦달해왔다. 본질적 주체인 정신이 허상적 객체인 물질문화에 일방적으로 예속되어 주객전도의 수렁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한다.
쌍두마차 : 마음을 본능, 감정, 이성, 의지로 나눌 수 있다. 넷을 친한 것끼리 짝지으면 본능과 감정 대 이성과 의지로 편 가를 수 있다. 마음의 건강을 도모하려면 이성과 의지가 본능과 감정을 무리 없이 달래고 제어해야 한다. 반대로 본능과 감정을 없앤 이성과 의지는 기계나 괴물과 같다. 마음엔 본능과 감정, 이성과 의지 두 편 다 쌍두마차로 함께 공존해야 할 식구다.
아픔과 기쁨 : 사랑은 아픈 만큼 사랑하는 경우와 기쁜 만큼 사랑하는 겨우 두 갈래로 나눌 수가 있다. 상대의 고통과 슬픔 고뇌를 자기 일처럼 아파하는 데 싹트는 사랑이 있고, 상대에게 베풀어서 오는 기쁨을 얻는 경우, 혹은 상대에게 기쁜 일을 함께 기뻐하는 경우다. 궁핍하고 춥고 어두운 마음에서 사랑이 싹트기란 어려운 일이다.
열쇠 : 스스로를 가다듬고 닦아서 이웃과 나누기 좋은 흥과 얼의 자취가 느껴지는 글을 만나면, 글 쓴 이의 땀과 뜬눈 밤샘과 박박 긁어댄 머리와, 오랜 눈물과, 손가락에 잡힌 물집이 떠오르고 그 손을 잡고 함께 울고 싶어진다. 그 사람의 모두가 그 마음에서 울어난 글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은 곧 서로의 문을 여는 열쇠다.
강박증 : 기우에 불과한 괜한 걱정거리가 마음의 안방을 차지하고 안절부절 못하게 닦달한다. 이는 마음의 때다. 마음에도 먼지가 낀다. 마음의 거울은 외모의 거울보다 몇 배 더 세심하게 보아야 마땅하다.
우울 : 현대 병중 대표적인 것이 우울증이다. 우울은 슬픔의 몸살이다. 몸살은 바이러스가 아닌 피로가 원인이다. 잘 먹고 푹 쉬면 낫는 병이다. 그러므로 우울증도 우선 마음이 푹 쉬어야 한다. 마음의 휴식은 마음속의 화기를 곰삭혀 기화해야 한다. 삭히는 것은 썩히는 것과 다르다. 마음속을 썩혀 죽이지 말고 삭혀 부활시켜야 한다.
집착 : 집착은 주는 것보다 가지려는 것에 익숙한 이기심 때문이다. 사랑과 집착은 자신에게 물어보면 알 수있다. 집착이 심할수록 괴로움은 더하다. 상대를 포기해주는 것이 상대에 대한 가장 큰 사랑일 때도 있다.
집중과 견제 : 인간에게 집중력만큼 위대한 능력은 없다. 집중엔 사물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과 마음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 있다. 마음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은 일정수준에 이르면 따로 집중할 필요 없는 경지에 다다른다. 저절로 마음이 시의적절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집중과 견제는 마음을 다스리는데 가장효율적인 방법이며 무기다.
한 마음 : 원불교의 경전 중 교조인 소태산 대종사의 말씀을 기록한 대종경에 마음을 다스리는 절묘한 법이 참 명료하고 쉽게 수록되어 있다. 요약하면 ‘부당한 행을 고쳐 정당하게 일을 하라’는 말씀이다. 또, ‘열 가지 일이든 스무 가지 일이든 한꺼번에 맡았어도 일심이 아니라 조각난 마음이다. 즉 일심을 공부하는데는 아무 상관없다는 뜻이다.
백팔 번의 마음 여행 : 글을 시작한지 석 달 만이다. 번뇌가 한두 가지라도 삶을 포기할 정도인데 백팔가지의 번뇌를 감당하기란 단 하루가 편할 날이 없다. 그러나 백팔번뇌는 백팔환희의 에너지이며 모태이기도 하다고 암담하기만 한 삶에 출구를 열어주었다. 즉 부정을 긍정으로 바꾸는 대단원의 출발이 번뇌다. 마음은 늘 번뇌의 뻐꾸기 둥지로서 고와 낙이 동거한다. //
* 가장 마음속에 남기고 싶은 글과 기억에 남는 글에 대한 감상 말해보기
* 이글에서 이의하고 싶은 점이 있다면 세 편 이내로 자기 의견 말해보기
김규성 시인
영광 구수산 깊은 골짜기에서 낳고 자라다. 너나없이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살 때는 시간의 주인이었으나, 궁여지책의 외도에 다름 아니던 도시의 일상은 갈수록 시간의 머슴살이만 같았다. 그리하여 틈만 나면 산으로, 들로, 강으로 달려가 잃어버린 모국어를 나누었다. 지금은 적송향 그윽한 산문(山門)에 남은 시간의 둥지를 틀고 작은 소쇄원처럼 세설원(洗舌園)을 가꾸고 있다. 그러나 그가 오늘도 산에 오르는 것은 해맑고 고요한 숨결을 머금어 세상에 내려가려는 소박한 꿈 탓이다. 그 일환으로 어머니를 배경으로 한 팡세인 『모경(母經)』과 마음에 관한 담론집인『백팔일 간의 마음여행』을 가다듬고 있다. 2000년『현대시학』으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고맙다는 말을 못했다』등이 있다.
김규성 시 한 편
고맙다는 말을 못했다
김규성
암벽 틈에서 홀로 의연한 억새꽃처럼
나는 한사코 내가 자수성가한 것으로만 알았다 그러나
나는 헤아릴 수 없는 은혜의 숲에서 낳고 자란
잡초 한 이파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아득한 은혜의 분신인 것을 알기까지
오! 생의 절반도 더 지났다
하늘에서 혼자 떨어진 줄 아는 부자가
가난한 이들의 피눈물로, 채워지지 않는 배를 부풀리듯
나도 숱한 걱정과 기도
때로 누군가의 애먼 상처 속에서 오늘에 이른 것을.
한 발 또 한 발을 뗄 적마다
아픈 등을 스스럼없이 받쳐 주는 땅
거친 숨결 다소곳이 받아서 되돌려 주는 공기
함부로 뒤 굽 밟아 신고 있는 가죽구두
아침에 먹은 현미밥과 햇나물, 알알이 다른 감기 약
이승의 점호 같은 안부 전화
그것을 위해 저토록 쉴새없이 바쁜 발길들이라니!
새록새록 벅차 숨이 막힌다
생각할수록 내 모질고 뻔뻔스러운 불감증이 아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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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Re: 아이들이 그린 그림으로 심리를 파악하는 방법 좀.. (0) | 2013.06.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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